16세기까지 기독교 예배의 모든 음악적 부분들은 주로 사제나 수도사 같이 교육받은 특권층이 불렀다. 그 가사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 교육받은 사람만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다성음악은 자신의 성부를 소화할 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들만 부를 수 있었다. 확실히 모테트 같은 중세의 다성음악 장르는 한정된 범위의 엘리트들을 위한 것으로, 특히 동시에 여러 가사를 부르는 곡들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신도들 없이 노래로 드려지는 예배들은 너무나 많았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일반 신도 없이 성직자와 가수들의 조직인 부속 에배당이 후원자 혹은 죽은 후원자의 영혼을 위해 미사와 성무일도를 드렸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많은 종교적 다성음악은 오직 음악가들과 신만이 듣는, 소수를 위한 혹은 내면적인 음악인셈이다.
교회음악을 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거나 회중이 노래해야 한다는 개념은 16세기가 되어서야 개신교 종교개혁과 함께 생긴 것이다. 새로 확립된 개신교 교파들은 신도들이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며, 음악이 가사를 명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이상의 영향을 받았다. 루터교회는 독일 땅에서 코랄을 개척했다. 코랄은 회중이 노래하는, 아니면 적어도 모든 회중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독일어로 된 찬가이다. 반면 칼뱅교는 모든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단순한 박절적 시편을 제외하고는 모든 음악을 배척했다. 영국교회는 짧은 단음절이며 영어가사로 된 앤섬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들 개신교 교파들에는 여전히 카톨릭 전례의 많은 요소들이 남아 있었다. 영국교회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에배를 만들면서 성무일도의 많은 측면들을 가져왔다. 오늘날 영어권 나라의 대성당을 보면 음악의 중점을 저녁기도 에배에 두고 있다. 루터교회는 전례력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예를 들어 바흐의 종교 칸타타들은 각각 특별한 일요일에 할당된 것이었다.
이후에도 교회는 주로 이념적인 이유로 고음악의 일부 레퍼토리들을 보존하거나 복원했다. 교황청 음악가였던 팔레스트리나의 작품들은 카톨릭 합창 음악의 이상을 대표하므로 그의 생전부터 지속적으로 로마 시스티나 성당에서 연주되고 있다. 영국은 1660년에 영국교회가 복구되자마자 교회가 원상태로 지속되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16세기의 레퍼토리들을 복원했으며, 교회 내에 있었던 그 이전의 다른 레퍼토리와 연주 테크닉까지 복원하기도 했다. 19세기 중엽에는 베네딕트 솔렘 수도원이 단성성가의 회복을 주도했다. 솔렘 수도사들은 가장 정통한 선율이란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는 자료에서 발견된 것이라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1900년경에는 개신교가 거의 지배하고 있는 영국에서도 카톨릭 음악 유산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한 방편으로 영국 카톨릭의 중심인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초기 영국 작곡가들이 작곡한 라틴어 전례 작품들을 복원하는 일을 주도했다.
세속음악
중세 유럽에서 교회는 권력이 막강했고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에 세속 음악과 종교 음악 사이에 경계선을 긋기란 어려울 수 있다. 종교적 가사로 된 작품들은 교회 예배 이외에도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또는 식사 시간 중에도 연주되었다. 우리는 이미 모테트가 어떻게 사제들의 오락물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았다. 게다가 군주와 귀족들의 궁전은 교회의 권력에 맞서는 대신 통치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종교를 이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궁정에는 부속 에배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예배에서 노래할 음악가들을 따로 고용하고 있었다.
15세기 이전의 세속음악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 밖의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기록하는 법을 반드시 교육받았던 것이 아니었으며, 교회의 경우처럼 전례의 통일성을 위해 레퍼토리들을 열심히 적어두어야 했던 것과 같은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의 그림, 조작, 편지, 시 등을 보면 기악음악이 연회나 축제 기간 동안 또는 술집이나 거리에서 유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증거가 많이 있지만, 사실상 몇 개의 춤을 위한 가락들이 적힌 필사본을 제외하고는 중세의 어떠한 기악 음악 악보도 현조하지 않는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그 지역어 가사로 된 단선율 노래들이 연주되었다는 증거는 더 많다. 이들 중 몇몇은 종교적이었으나 대부분은 사랑 노래였다. 11세기와 12세기 동안 프랑스에서는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라 불린 싱어송라이터들이 고귀한 여인에게 기사가 그의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는 식의 우아한 사랑을 주제로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독일어권에서도 민네장이라고 하는 비슷한 레퍼토리가 있었는데, 도덕적이거나 풍자적인 주제에 관한 것도 많았던 반면, 저속한 화제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14세기에 이르면서 점점 더 다성 노래들이 엘리트 음악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초기 다성 노래 장르들은 발라드, 론도, 비를레 같이 그것이 기초한 시 형식에서 이름을 따왔지만, 15세기 중반이 이르자 샹송이나 프로톨라처럼 하나의 시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시 형식을 사용하는 노래 유형들이 나왔다.
1600년경에는 독창 노래가 다시 주류를 이루었는데, 가수의 노래를 류트나 건반악기 같은 화음 악기가 콘티누오 반주를 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줄리오 카치니의 노래 모음 [신 음악]이 출판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감정적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피렌체인들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지만, 또한 나폴리와 로마의 기보되지 않은 대중 노래 전통에서 유래한 선율과 화성의 구성 방식도 포함하고 있다.
17세기에 세속음악은 성악음악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순수한 기악음악 장르의 등장으로 그 중요성이 더해졌다. 이전의 기악음악들은 대부분 성악곡들을 악기로 옮긴 것이었다. 반면에 소나타와 콘체르토 같은 새로운 기악 장르들은 성악과는 별개로 구상된 것이고, 따라서 종교적인 가사와도 거의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몇몇 기악 작품들은 교회에서 유래했거나 교회와 관련이 있었다. 아르칸젤로 코렐리는 교회 소나타도 작곡하고 실내 소나타도 작곡했는데, 실내 소나타의 특징은 교회에서 연주하기에 부적절한 춤 악장들을 사용했다는것이다. 주세페 토렐리의 협주곡들은 볼로냐의 산페트로니오 성당의 반향을 일으키는 음향을 고려해서 악기들을 묶는 방식을 달리한 실험들을 통해 개발된 것이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협주곡 F장조, RV 286] '산 로렌초 축일을 위하여'나 [협주곡D장조, RV212] '산 안토니오 산타 링구아 축일을 위하여' 같은 몇몇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곡들이 종교적 예배에서 연주되었음을 알려주는 제목들이 붙어 있다. 세속음악과 종교음악은 18세기 중반까지 여전히 이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