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학

[음악학]음악미학과 비평이론, 음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군 2020. 3. 21. 18:22

판단

 

  음악은 바움가르텐의 관심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 음높이, 음길이, 강세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인 설명으로 환원시킨다면 음악은 무엇이 되겠는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객관겅니 요인들이 음악이 되기 위한 어떤 것에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그들 중 어떤 것도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 음악의 다른 측면들을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판단 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른 측면들은 모두 '주관적'인가? 여기서 말한, 비지각적인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는 것 사이의 긴장은 음악학에서 게속되는 의견 차이와 관계가 있다. 음악은 객관적으로 분석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표현하는 것, 그것의 역사적 의미, 그것이 감상자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는가? '과학적인'인 것과 주관적인 판단이 포함된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단지 음악학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시작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의 차이가 바로 여기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말해준다. 그것은 각각 오실로스코프로 측정된 주파수들로, 또는 하행 장3도로, 또는 '문을 두드리는 운명'으로 묘사될 수 있다. 어떠한 묘사가 더 적당한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음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범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이 미학적 문제의 핵심이다. 이러한 대립되는 규범들을 판단할 수 있는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는 그 규범을 위한 다른 규범이 필요하고, 또 다른 규범이 필요하고, 그렇게 영원히 게속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인다.

  바움가르텐의 제자인 칸트가 1790년에 [판단력 비판]에서 자신의 새로운 철학으로 자연의 미와 인공적인 미를 주제로 삼은 것은 미학의 등장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칸트의 철학은 경험주의자와 합리주의자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을 목표로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의 지각으로부터 '객관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데에 주관적인 마음이 활발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판단은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아니다. 그것은 과학과 예술에서 모두 우리가 능동적으로 '하는' 무엇이다. 칸트는 1790년대부터 발달한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한 새로운 낭만주의적 사상을 탄생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상은 특히 자아와 그것의 자연과의 관게에 대한 설명에 집중했던 철학가이자 작곡가인 장 자크 루소의 저작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슈만, 쇼팽, 베버 이후에 낭만주의 음악에서 분위기와 느낌이 얼마나 중요해졌는가 생각해보라. 이것은 무엇이 주관적이고 무엇이 객관적인가라는 문제의 좋은 예이다. 예를 들어 음악이 땅거미가 지는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때 그것이 단지 그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어삼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면 불쾌할 것이다. 우리는 전혀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음악을 들어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종종 자연은 우리와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자신도 역시 감정적으로 자연의 세계에 반응하는 자연의 유기체이다. 이러한 것들이 음악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우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객관적인 과학적 지식은 우리가 사물과 갖고 있는 주관적인 관계를 어느 정도까지 설명해줄 수 있는가? 이런한 관계는 우리가 자연에 있는 어떤 것 혹은 예술 작품을 아름답다고 판단할 때 분명해진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주관적이라고 할지라도 칸트는 그러한 판단들과 아이스크림 맛처럼 다른 것들보다 우리가 더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판단들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미의 판단에는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찬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포함된다. 비록 미학적 판단이 과학에서의 판단과 같이 않다 하더라도 미학적 판단이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미학적 판단에 공감하는 다른 사람들을 얻으려고 애쓴다. 칸트는 이러한 판단이 우리를 인간으로서 보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공통감'이라고 불렀다. 이 사상은 전통적 규범의 상실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생겨난 차이들을 인간이 초월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19세기 초부터 음악 안에서 사회적 통합이라는 목표가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음악이 여전히 후원자들에게 많은 무게를 두었음에도 그의 음악에 존재하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간접적이어야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나 7번 같은 불후의 명작은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바그너는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수단으로서 음악극을 생각해냈다. 그렇다면 음악은 정말 사람들을 함께 묶어줄 수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음악은 실제의 갈등을 숨기고 있는 일종의 기만일 것이다. 19세기에는 그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후 음악과 정치의 연결이 극히 뚜렷해지면서 이러한 대조는 음악 미학에서 더 활발하게 논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