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학]고음악6, 작곡가의 위상의 변화
작곡가의 위상의 변화
기보법에 대한 앞선 논의를 통해 작품이 어떻게 연주자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준 상태로 유포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1750년 이전 대부분의 레퍼토리에서 연주자와 작곡가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 자기 자신이 쓴 시에 작곡을 하고 노래도 했던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처럼 종종 연주자와 작곡가는 같은 사람이었다. 설사 연주가와 작곡가가 다른 사람이었을 때도 가수와 악기 연주자들은 그 작품의 전체 틀과 장식 전반을 결정할 수 있는 상당한 재량이 있었다. 한편 19세기와 20세기의 연주회 문화에서는 연주자에 비해 작곡가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초기에 기보된 악보들에는 일반적으로 작곡가에 대한 정보가 없다. 실제로 현존하는 1750년 이전의 음악에서는 작자 미상의 작품이 작곡가를 아는 작품보다 많다. 단성성가의 경우에도 그 선율은 기보법이 발명되기 이전에 수 세기 동안 구전된 것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해 알 수 없다. 즉흥적으로 노래되던 성가들이 전례를 표준화시키려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 점차 정해진 형식을 갖후었을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명칭의 유래에서 볼 수 있듯이, 교황 그레고리 대제가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이 들려주는 선율을 받아 적었다는 전통은 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종교적 영감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음악을 신의 선물로 보는 중세의 시각을 반영한다. 그 사고방식에 따르면 신의 모든 작품의 궁극적인 창조자이다.
14세기까지 단성성가는 대부분의 다성음악의 기초였다. 성경 필사본에 주석 설명과 삽화가 더해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성음악은 종교적 선율에 주석을 단것이다. 작곡가의 역할은 신선한 무엇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재료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창조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전통은 16세기까지 지속되어 많은 미사들이 기존의 다성음악 작품의 구조와 주제를 기초로 했다. 이른바 패러디 방식인 이것은 팔레스트리나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모테트 [마리아가 승천하였도다]에 기초해서 미사를 작곡했다. 1610년까지만 해도 몬테베르디는 니콜라 공베르의 모테트 [성스러운 시간]에 기초해서 그의 미사를 작곡했다.
음악이 더 자세히 기보되고 더 많은 작품들이 작곡가의 주변을 넘어 유통되면서 작곡가의 위상은 높아졌다. 14세기 대표적인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던 기욤 드 마쇼가 자신의 작품만을 담은 필사본으로 노래와 종교 음악을 보급한 것을 보면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연주자나 음악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작곡가로서 더 폭넓은 인정을 얻어낸 최초의 음악가 중 한 명이 헨리쿠스 이자크이다. 그는 1497년에 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언 1세에게 이전 작곡가들처럼 가수나 기악연주가로서가 아니라 '궁정 작곡가'로 고용되었다. 그와 같은 세대에서 가장 유명했던 작곡가는 조스캥 데 프레인데, 그가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주로 당시 새롭게 발명된 음악 인쇄 기술을 통해 그의 작품이 멀리 퍼져나간 덕분이었다. 편집자와 출판인들은 조스캥이 작곡하지 않은 작품에도 조스캥의 이름을 붙여 인쇄해서 판매했다. 1540년 독일 음악가 게오르크 포레스터는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저명한 사람이 조스캥은 이제 죽었는데도 살아있었을 때보다 더 많은 작품을 쓰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작곡가를 더 인정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노르망디 에브뢰에서 1575년부터 1589년까지 한 단체가 개최했던 작곡 경연대회이다. 여기서는 매년 최고의 작품에 상을 주었는데, 이는 관심의 초점이 연주가에서 작곡가로 옮겨졌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작곡가의 위상은 게속해서 강화되지 않았다. 17세기에 기악과 성악에서 비르투오소 기교를 강조함에 따라 작곡가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이 시기 오페라 청중은 오페라를 감상할 때 스타 가수들의 이름은 전부 알았음이 분명하지만, 아마 그 작품의 대본작가의 이름은 알았더라도 작곡가의 이름까지는 몰랐던 것 같다. 18세기까지 연주자들은 계속 그들의 특권으로 생각하던 경계를 지키려고 했다. 1737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요한 아돌프 샤이베로부터 음악에 너무 세부적인 것까지 지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연주 방식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장식까지도 완전히 음표로 표현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서 조화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갈 뿐 아니라 선율 전체를 완전히 덮어 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