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학]오페라2, 현재는 오페라와 사회와의 관계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오페라 제작 작업의 분석
어떤 면에서 오페라는 낙타에 비교될 수 있다. "낙타란 위원회가 고안한 말"이라는 속담이 있다. 수천 개의 오페라와 뮤지컬이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주로 각기 다른 분야를 맡은 사람들이 적절한 비중으로 제대로 함께 일하는 것에 실해했기 때문이다. 음악극을 잘 제작하려면 모든 부분의 작업이 고르게 믿을만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거기에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작품은 독립된 각 요소들의 혼합물이다. 위험은 도처에 있다. 형식이 주제와 맞지 않을 수 있고, 성악 솔로가 연기를 방해할 수 있고, 음악이 밋밋할 수 있으며, 줄거리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무대 위에서나 노래를 부르는 중에 돌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공연장에 온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르게 감상한다. 어떤 사람은 성악의 음색, 다른 사람은 볼거리에, 또 다른 사람은 악보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교향곡 작곡가인 안톤 브루크너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보는 동안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눈을 감는 것은 지루함이나 혐오감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도 언택할 수 있는 옵션이기도 하다.
오페라 제작자들은 대개 너무나 바빠서 자신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기록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편지, 서문, 프로그램 노트들을 통해 정보를 얻어낸다. 다른 작가들은 토론을 위한 틀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피에르루이지 페트로벨리는 그의 서문에서 세 개의 '체계'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음악극에서 세 개의 체계란 "무대에서의 연기, 대본에 있는 대화의 언어적 표현, 노래될 뿐 아니라 연주도 되는 음악"이다. 이러한 체계는 세 가지를 합한 것 이상의 무엇을 창조하기 위해 각자의 특성이나 법칙에 맞추어 동시에 작동된다. 그는 "음악의 기능은 이중적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극적 사건의 시간적 차원을 설정하며 또한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성격을 부여한다." 즉 음악은 사건의 진행 속도를 정하지만, 또한 이들 사건에 대해 논평한다. 페트로벨리는 시의 구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대본이 갖는 내부적인 형식과, 시에 음악을 입히는 방식에 대한 작곡가의 결정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고도로 예민한 결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사가 어떤 공연에서든지 사건 동기, 인물의 성격, 분위기 같은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가수마다 억양이나 말 빠르기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음높이, 리듬, 음길이는 정확하게 통제된다. 이와 더불어 작곡가들은 그 순간의 서사에 필요한 정보와 관련된 단어들을 어떻게 묶을까를 결정함으로써 화성과 반주까지 통제한다. 작곡가가 선율을 작곡 하자마자 발설된 것의 가치와 시적 가치에 대한 왜곡이 일어난다.
울리히 바이스슈타인은 400년에 걸친 오페라라는 '낙타'가 기본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설명하면서 이와 유사한 '체계'에 대해 보다 야심차게 규정하고자 했다. 그는 오페라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스펙트럼에 대해 논했다. 그의 스펙트럼의 한쪽 끝은 오페라에 있어 어떠한 진정한 극적 타당성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끝은 리하르트 바그너처럼 "오페라가 감각과 소리가 동등하게 합쳐진 진정한 공생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페리의 [디프네]와 [에우리디체]와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에서 나타나는 문학적 요소, 즉 시적 가치는 음악을 형성하는 데 깊이 반영되었다. 바이스슈타인에 따르면, 오페라는 여기에서 그리고 후에 많은 시점에서도 음악으로 표현된 극적인 시로 지각하는 '기본적으로 문학적인 장르'로 받아들여졌다. 이 오래된 관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과거 오페라 비평에서 음악에 대해 거의 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베르디의 오페라'또는 '헨델의 오페라'라고 말하지만, 과거라면 오페라가 여러 분야가 균형을 맞춘 독립체임을 가리키도록 그 이름을 다르게 붙였을 것이다.
후기 바로크 시대에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어느 시대에 오페라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오페라가 "우선은 볼거리", 즉 오감을 즐겁게 하는 오릭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오페라의 관점들을 담고 있는 별도의 범주들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음악의 영향력이 훨씬 더 무겁다.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을 제작하는 중이었던 1781년 10월 13일 모차르트가 쓴 편지를 보면 "잘 고안된 오페라는 모두를 즐겁게 해야 한다. 가사는 음악을 위해 분명하게 써야하는 것이지 여기 저기 보잘 것 없는 각운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같은 편지에서 모차르트 자신의 음악은 드라마에 맞게 재단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만약 우리 작곡가들이 우리의 규칙을 따른다면 우리는 꼭 오페라 대본처럼 쓸모없는 유형의 음악을 낳게 될 것이다". 재능이 없는 시인의 잘못이건 반응 없는 작곡가의 잘못이건 여기서 모차르트가 말하는 것이 바로 낙타의 망령, 즉 고유의 기능과 균형을 잃어버린 오페라인 것이다.
사실 바이스슈타인의 '친 음악'범주는 모차르트의 부모나 조부모 세대인 이탈리아 바로크 전성기의 오페라들에 더 잘 부합한다. 이른바 오페라 세리아 양식에서 솔로 아리아의 음악적 가치는 오페라 작품 자체의 전체 디자인을 좌우한다. 아리아를 부르는 동안 외형적인 연기 동작은 거의 정지된다. 대부분의 아리아는 다카포 형식이라 불리는 ABA' 패턴으로 되어 있다. 아리아는 대개 성악 카덴차로 끝을 맺는데, 그 이후에 항상 가수들이 무대를 떠나도록 플롯을 구성하는 것은 매우 인위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극적 현실주의에 대해 완전히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멋있는 아리아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것과 역사적인 플롯의 극적 흐름 사이의 모순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다. 어떤 청중은 노래에, 또 어떤 청중은 시에, 또 다른 청중은 카드 게임, 술,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에 집중했다.
바그너는 모든 요소들이 함께 녹아 있는 극예술 작품을 가리키는 용어인 '종합예술작품'으로 유명하다. 우선 바그너는 개인적이고 영향력 있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 당시 기존의 오페라 관습을 해체하고 새로운 원칙 위에서 각각의 요소에 대한 틀을 다시 세웠다. 그 최초의 결과물이 [니벨룽의 반지] 연작인데, 1840년대 말에 구상되었지만 1876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상연시간이 모두 17시간이나 되는 네 개의 연작 오페라에서 바그너는 자신이 대본과 음악을 쓰고 극장을 디자인하고 무대를 만듦으로써 작품의 모든 측면을 완벽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그가 이룬 성과는 자연스럽게 이후 수 십 년간 오페라에 대한 사고와 그것의 작곡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바그너가 오페라에 일관성을 부여한 방법 중 하나는 라이트모티브를 사용하여 음악적으로 상호참조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라이트모티브는 유연하고 기억하게 쉽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황이 진전되는 것에 따라 라이트모티브도 발전할 수 있었다. 페트로벨리의 용어로 말하자면, 라이트모티브는 "무대 사건들의 특징을 나타낸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우리를 등장인물들의 마음속으로 데려가고, 미래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과거의 사건들을 '상기'시킴으로써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바이스슈타인의 마지막 범주는 20세기 모더니즘적 유형들과, 대화를 사용하는 많은 오페라 장르에서 매우 중요하게 적용된다. "가사와 음악은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갖지만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는 그것을 "반 바그너"유형이라 칭하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하는 이른바 "소외 효과", 즉 극적인 환영을 거부하고 관객이 의식적으로 극적 사건에 대해 거리를 갖게 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브레히트는 청중이 생각하는 머리를 가지고 오페라 극장에 오도록 요구했다. 다음은 그의 시 [노래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나 [마하고니시의 흥망], 또는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같은 작품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을 설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