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오락과 의식
오늘날도 오페라는 여전히 공동의 문화적 목표를 위해 사람들이 함께 수행하는 인간 활동인 의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할 수 있따. 오페라 인류학은 오페라와 종교적 의식이 모두 음악과 조직화된 행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유사성에 주목한다. 존 드러먼드가 쓴 책은 오페라와 선사시대를 다양하게 연결시킨다. '우리는 언제 음악 드라마가 시작했는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에게 음악 드라마가 없었던 시기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그는 기원전 약 3만 년 전에 그린 블랙풋 전설의 버팔로 춤을 묘사한 동굴 벽화를 언급한다.
실제로 파스토랄이나 인테르메디오 같은 기존 형식으로부터 지금의 오페라를 창조했던 피렌체의 르네상스 지식인 클럽도 의도적으로 고대 그리스극에서 영감을 가져왔다. 최초의 실험적인 오페라의 예는 1597/8년에 오타비오 리누치니가 대본을 쓰고 자코포 페리가 작곡한 [다프네]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 이전의 역사도 상당하겠지만 오페라 자신도 벌써 400세가 넘었다.
오페라는 종합 예술로, 거기에는 연기자 겸 가수, 연주자, 무용수, 무대장치, 조명, 무대 소품, 제작진, 그리고 갖가지 용품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400년 전에도 오페라에서 필요했었다. 이처럼 오페라의 목적과 전통이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과거의 오페라들을 무대에 올리고, 녹음하고, 또는 잃어버렸거나 잊혀진 작품들을 찾아내는 등 그것을 오늘날과 연결시키고 있는 명분이다. 1960년대에 시작된 고음악 회복 운동은 몬테베르디, 카발리, 헨델 등의 오페라에 대한 수요를 낳았고,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파생 효과로 오페라 음반 레퍼토리가 급증했고, 최근에는 DVD의 등장으로 또 다시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오페라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비디오테이프가 나온 후로 행복해졌다. 오늘 녹음된 오페라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내일의 무대 제작의 발전을 이끌 전문가들이 될 것이다. 음반 회사와 오페라단이 협력해서 제작한다면 서로 경비를 절감할 수 있고 DVD로 녹음된 레퍼토리도 많아질 것이다.
관객이 돈을 지불하면 입장할 수 있는 공공오페라는 1637년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공공이라고 해도 공연은 여전히 호화로웠고 특권층만이 그것을 관람했다.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주고 보조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오페라의 재정은 늘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오페라는 '특별히 탁월한'공연 예술이기 때문에 그것의 미래에 대한 논쟁은 수요 공급의 법칙에 결정ㅇ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한편에서 오페라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오페라가 드라마, 연기, 음악 등에 대한 기술, 에너지, 경험들이 합쳐진 극장 형식으로, 유일무이하고 가치 있고 명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야에서는 오페라의 문화적 자본을 매우 높이 평가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오페라 관습이 사치스럽고 인위적이라고 매도하면서 이를 검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즈니스와 오락으로서 오페라는 텔레비전, 영화, 스포츠와 경쟁해야 하므로 기획자들은 더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뮤지컬을 개발한다.
실제로 오페라의 죽음은 꾸준히 이야기된 것이었다. 1955년에 있었던 아도르노의 강연 '부르주아 오페라'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시작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오페라의 지위와 기능은 의심스럽다. 사실 그것은 지엽적이고 무관심한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왜냐하면 부르주아 청중이 언제나 똑같은 것을 듣기 원하기 때문이다'. 1967년에 피에르 불레즈는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시대의 음악의 필요에 더 잘 맞는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 기존 오페라 하우스를 폭파하자고 제안한다. 1994년에 풀 그리피스는 1945년 이후의 오페라에 대한 연구를 통해 1970년대까지 게속해서 아방가르드 오페라 작곡가들이 '음악극에서 새로운 종류의 표현을 추구한 것이 결과적으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오페라라는 장르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공연은 계속되고 있으며 중요한 작품들이 게속 창작되고 있다. 또 훨씬 주목할 만한 움직임도 있었는데, 2004년 영국의 글래스톤베리 팝 페스티벌에서는 야외에 텐트를 친 청중이 영국 내셔널 오페라단이 영어로 공연하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마지막 막을 감상했다.
비전통적 작품들을 새로 쓰고, 봉사 공연 활동을 펼침으로써 오페라는 '부르주아 오페라'라는 딱지를 떼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오페라' 자체의 티나 람나린이 말하는 것처럼 특정한 '상호작용의 방식'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다. 부르주아 오페라는 집단적인 의식과 오락을 통해 특정 게층의 사람들을 만족시킨다. 이 활동은 외부인을 배제시키고 개인적, 직업적, 정치적 차원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강한 사회적, 정치적 기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제작에 자금을 내든지, 아니면 간부들을 위해 비싼 좌석을 구매하는 등의 오페라에대한 기업 후원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오페라가 1637년에 처음으로 일반 대중을 받아들이면서 극장 재정은 개인적인 자본에 의존했으며 재정적 안정성을 위해 회원 제도가 도입되었다. 여러분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박스를 하나 임대하여 집의 일부처럼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회원 제도가 극장 입구에서 표를 사는 사람들을 배제시키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페라가 음악과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는 사회적 의식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부를 과시하기 위한 궁정 오락이라는 오페라의 원래의 기능과도 일맥 상통한다. 부르주아 사회는 단지 그 아이디어를 빌려와서 귀족적인 선호와 연결시켰던 것이다.
본래 의식의 형태는 나라별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오페라는 특권층과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었든 간에 사회마다 다른 정취를 갖고 있다. 오페라에 참석하는 예전부터 시작된 방식이 아직도 많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여름에 이탈리아를 간다면 베로나에 가서 석양에 작은 촛불을 밝힌 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 야외에 있는 로마시대 원형극장에 모인 2만 명의 관람객들에게 경외심이 가득하고 침묵이 깔린다. 이러한 공연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오페라는 대부분 원래의 언어인 이탈리어로 연주되기 때문에 항상 이를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것은 단지 관습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작곡가가 자국어 음향에 맞춰서 선율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는 서로 다른 음성적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실제로 음악이 다른 언어로 표현된다면 다른 소리가 된다.
무엇보다 사회와 언어가 다르면 목소리의 유형과 발성을 하는 테크닉이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화되고, 성악가들이 빈번하게 세계를 여행함에도 불구하고, 오페라는 여전히 국가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200년 이상 이전에 패니 버니의 소설 [에블리나]에서 일어났던 상황은 오늘날 세계의 다양한 도시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브랭턴이 느꼈던 긴장을 나름대로 해결하고 오페라의 민주화, 즉 보통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가는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예를 들어 음악공연 극장을 한 쌍으로 지어서 큰 건물은 역사적으로 화려한 특권을 누린 오페라 장르 전용으로 사용하고, 다른 건물은 희극이나 지역적인 작품 전용으로 사용한다. 이 모든 장르에는 다양한 이름들이 붙여졌으나 그 장르의 개념들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분류상의 표시'를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장르의 개념이 변하는 이유로는 1)세계적인 핵심 레퍼토리의 교체 2)넓은 범위에서 '오페라'와 '뮤지컬'로 나뉨 3)오래된 형식들과 관슴적 사고를 피하려는 많은 작곡가들과 대본작가들의 조직적인 욕구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엘리트, 부르주아, 노동계극 븓의 사회적 계층과 음악극을 즐겼던 장소 사이의 오래된 연대감은 여전히 남아있다. 헨리 스토바트가 '영역 표시'라고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연대와 관련해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영역'에 적당한 장르가 정해지는 시스템이 생긴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심지어 수출할 수 있는 오페라가 있다고 해도 오페라를 자율적인 생산물로 여기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오페라 공연은 지역에 따라 아주 많은 문제를 다르게 다룬다. '부르주아 오페라'가 1920년대 독일에서 의미했던 것과 1980년대 러시아 또는 1680년대 프랑스에서 의미했던 것은 각기 다른 것이다.
음악극의 미래에 있어서 미국식 뮤지컬이든 빈의 오페라든 런던의 [길버트와 설리번]버라이어티든 희극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 뮤지컬은 허세를 버리고 오락적인 면을 중시했으나, 이제는 야망의 지표가 너무 넓어져서 최고 뮤지컬들은 주류의 정전으로 자리 잡았다. 보조금 없이 이윤을 내는 음악극을 쓴다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다. 한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 시사하는 것처럼 '부르주아 오페라'를 피하는 또 다른 길은 간단하게 과거의 특권을 누리던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생 극장, 아트센서, 공원, 교실, 달리는 열차 안 등 모두가 오페라 공연장으로 이용될 수 있다. 과거의 유랑 오페라단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음향적인 어려움들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때에는 마이크로 노래하는 것이나 신디사이저를 사용하는 것이 그 문화를 상징하는 표시이다. 그러나 전통을 지향하는 청중들은 비록 그 지역의 공작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자연의 소리로 노래하지 않는 런던의 홀랜드 파크 오페라 시즌을 절대로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희극적인 정신은 오페라 비평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의심스러운 연주나 취향에 대항하는 역설 혹은 해학은 낡은 전통이 된 듯 했으나 최근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운명의 힘]에 대한 앤드류 클레멘츠의 비평처럼 그들은 여전히 효력이 있다. 그의 비평은 비꼬는 투로 이렇게 시작된다. '개막 공연에 대한 환호는 적어도 몇몇 오페라 청중만이라도 그 거친 오페라 예술이 잘 살아있다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다.
이날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좋지 못한 명성을 가져다 준 밤이었다. 성악가들은 옆 나라에 있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기라도 하려는 듯 음이 올라갈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러 댔다.(중략)베르디의 위대한 군중 장면들은 학생 사진사들의 극적인 재능 때문에 모두 변형되었다. 마지막 인사를 할 때 로열 오페라 합창단은 그들이 한 것에 대해 그것을 목격한 우리들만큼이나 민망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
최근에 테크놀로지는 오페라를 보다 잘 들릴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이제 오페라 DVD 자막의 언어를 선택할 수 있다. 무대 위의 스크린에 나오는 자국어로 된 자막은 브랭턴 씨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나 빈 국립오페라극장이나 코벤트 가든에서 연주되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잘 알아듣기 위해 이탈리아어 농담을 외우려고 애썼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때맞추어 번역된 자막을 비춰주니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으로 무엇을 잃게 될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자막을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18세기에는 오페라 하우스 조명이 공연을 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인쇄된 대본들을 통해 가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았던 것을 이겅하라. 실제로 오늘날의 자막과 당시의 대본은 방식이 다르지만 목적은 똑같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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