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예배
무릇 어떤 의미에 있어서의 절대자와 살아 있는 교제를 하려하는 종교는 예배라는 행위를 중요시 해 왔다. 그리스도 교회도 그 역사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예배의 종교로서 성격을 형성하여 왔다. 그러나, 각 교회와 교파에 따라 예배란 무엇인가, 에배 때에 어떤 의식을 가져야만 하는가 하는데 관해서는 그 견해에 큰 차이가 있다. 주지하는 대로 기독교에도 카톨릭, 신교, 희랍 정교 등 큰 구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교회 및 교파가 분립하여 세워졌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에배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주장하고 있고 스스로도 그것에 의해 살아 있는 복음의 진리는 어떤 윤리적 교훙의 체계나 하나님에 관한 이념 및 세계나 인간에 관한 지혜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적 진리인 것이다. 바울은 예배가 올바로 행해질 때에 일어날 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보통 교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마침내 자기 마음에 품은 비밀이 폭로될 것입니다. 그러면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4:24, 25) 즉,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시다고 하는 사실이 예배의 중심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취하신 주 에수 그리스도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임재하시고, 그를 예배하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실을 지금 이 때에 이 세상의 사실로써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진지하게 대두된다. 신부가 받드는 성체, 실체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으로 화한 호스티아를 존중하는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그 점에 관하여 뚜렷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견해가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많은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는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순수하게 거룩한 의식이 집행되는 거룩한 무리라 표현되어 있다. 이 교회의 표시에 관한 규정은 교회가 무엇보다도 예배 공동체임을 밝힘과 동시에, 에배에 있어서는 설교와 거룩한 의식이 기독교 진리를 현실적으로 나타내는 것임을 가리키도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설교와 성례가 행해지는 예배를 교회라는 공동체의 예배의 행위로 정비하기 위하여 한 편에서는 교회의 예배 전통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는 자기 고유의 입장에서 이를 새롭게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에서 이 점에 관한 이해가 애매하게 되어 설교만을 존중하고 성례를 경시한다든지 혹은 아주 없애기까지하였고, 예배 형식을 정비하기보다는 자유롭고 자연 발생적인 집회편을 올바르다고 보기도 하여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게 되었따.
한국의 목사들 중에는 자기가 설교자이며 목회자라는 자각은 있지만, 의식의 사회자요 예배를 만들고 집행하는 책임자라는 의식은 희소하며, 기도하는 자로서 특히 교회의 기도를 짊어진 자로서 자신을 훈련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점은 교회 음악 종사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예배를 위한 음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순수하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음악은 아무 쓸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있는데, 경솔하게 음악적인 자기 주장으로 반론을 펼 수는 없는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왜 음악이 있어야만 하는가. 에배는 현실적 진리로서의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현실을 알려 주고 증언한다는 것, 그를 위해 찬미 애배한다는 것이 항시 의도되는 것이다. 개개의 행위에 이 역할이 분담된다는 식으로 단순히 생각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설교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 자신이 찬미 감사의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오직, 증언한다는 역할이 좀더 강하게 의식되는 것이다. 음악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자기 표현이다. 하나님의 은헤에 대하여 가능한한 신앙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바치는 것이 찬미이며, 그것으로써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행위이기도 하며, 설교로써는 충분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며 설득력 있는 증언이 되는 것이 음악이다. 또한 이 세상의 괴로움으로부터 생기는 기도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어떻든지 교회 음악에 봉사하는 자는 그 입장이 이미 교회의 에배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예배를 형성하는 일을 통하여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배 형성에 즈음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예배를 역사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를 살게 하는 역적 전통은 무엇보다도 예배의 역사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역사를 다시금 배우는 것으로써 자기네가 무엇을 잃었고 또한 무엇을 찾아야만 하는지를 잘 알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지게 하는 자기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에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교회력과 그와 결부된 성서 일과(페리코페, 교회력과 관계지어 연간 각 주일의 에배에서 낭독하기로 정해져 있는 일정한 성서 구절0등은 적어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리라.
어떤 입장에서 보든지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선 무엇보다도 설교이다. 단, 그것은 그에 앞서는 성서 낭독과 분리하여 생각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의 말씀이 얼마만큼 중요시되고 사용되는지 이 예배의 성서적 성격을 묻는다는 것은 예배에 있어서 의외로 잊혀지고 있는 사실이다. 성서가 낭독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들려지기 위하여 설교가 행해진다. 그리고 그것과 더욱 분리시킬 수 없는 성례가 행해진다. 사용하는 물질이 거룩한 것으로 바뀌어서가 아니라 성서에 바탕을 두고 신앙과 기도로써 이에 참여하는 신앙자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자기를 현실화하는 것이 귀중하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에배를 드리는 행위 자체보다도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말한다는 것, 즉 기도와 노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경우에도 귀중한 것은 모든 교회의 이름에 의한 공동적인 기도와 노래하는 사실이다. 교회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각개 신앙자의 기도도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그 기도의 내용인것이다. 예배의 간소화를 도모한 칼빈도 이 기도를 존중하여 회개와 감사와 심령의 기도 등을 올바르게 정비하려 하였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예배의 기도를 재검토해야만 한다. 이 점은 노래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현행 찬송가의 경우에도 예배의 노래나 교회의 노래로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우선 현행 찬송가를 보다 잘 알고 연구하여 그 적절한 사용법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음악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음악학]예배와 음악2, 예배의 역사(중세) (0) | 2020.03.19 |
---|---|
[교회음악학]예배와 음악2, 예배의 역사(초기) (0) | 2020.03.19 |
[음악학]음악심리학, 우리는 음악을 어떻게 창작하는가? (0) | 2020.03.18 |
[음악학]음악심리학, 우리는 음악을 어떻게 배우는가? (0) | 2020.03.18 |
[음악학]음악심리학, 어떻게 음악적인 마음이 작동하는가? (0) | 2020.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