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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

[교회음악학]예배와 음악2, 예배의 역사(중세)

예배와 음악2, 예배의 역사 중세

 

  동방교회에서는 대체로 이른바 '비잔티움 예전'과 성 크리소스토모스의 예전으로 통일되어 가는 바, 그것들을 박해기에 형성된 예배관을 지니고 오늘날 이르기까지 신비적이고 직접적인 예배 신학을 전해주고 있다. 한편, 서방교회에서는 6세기 초엽부터 그 때까지 서방교회에 유포되어 있는 몇 개의 특징 있는 여러 예전이 옛 로마 예전에 흡수되기 시작하여 교회의 중앙집권화의 한 측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즉, 스페인에 퍼진 '모자라브 예전'. 밀라노에 전해진 '암브로시우스예전', 고을 지방에 전해지는 '갈라예전', 등의 대표적인 예전 전승이 로마 예전에 흡수되어, 11세기 경까지에는 서방교회 안의 예전 통일이 거의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통일적인 예배 형태에 있어서도 그 중심이 된것은 '상기'였으나, 그 '상기'는 이제 성직자에 독점된 예전 봉사 그 자체로 동일시되는 생겨, 민중은 이 성직자에 의해 연출되는 '상기'의 드라마의 관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드라마(미사)를 통하여 내려지는 은혜의 선물은 은혜라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6세기 경부터 시작된 성도의 성찬식 참여의 감소는 11세기 경에 이르자 극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때때로 잘못 전해지는 것처럼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상기에서 전혀 동떨어진 것은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리들에게 있어서 제단에서 객관적으로 집행되는 상기의 드라마와는 별도로 무리들 자신을 위한 '상기'의 역사하심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그 시대에 있어서의 교회력 시스템의 완성이었다. 그것은 1년의 사이클로서 생활 전체를 통하여 '상기'를 전개하는 커리큘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상기'에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의 기념도 삽입되어, 드디어 그것이 일종의 축제일로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회중들에 의한 다른 하나의 '상기'의 역사는 10세기 전후에 최성기를 맞[미사 해설서] 내지는 [기도서]에 의한 기도인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집행되는 미사 예전문 낭독을 들으며,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미한다고 설명되는 입제문으로 시작되여, 예배(미사)의 한 단계마다 그리스도의 생ㅐ 중 중요한 일을 '상기'하여 명상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인도서이다. 그것에 의하여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리는'의미로서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상기'가 회중들에게 행해진 것이다. 이 안내서에는 신부가 거록한 떡을 높이 드는 '봉거'의 부분은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장면에 대한 명상이 되게끔 고려되었고, 회중이 미사 속에서 제단이라는 골고다 언덕에서 그때마다 그리스도가 괴로움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는 극히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대하여 후세 종교개혁자들이 맹렬하게 반대한 사실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어떻든, 이렇듯이 성직자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연출된 상기의 드라마로서의 예배와 회중들이 마음속으로 개별적으로 주관에 의해 행한 경건한 기도라는 평행된 이중의 에배는 결국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상기가 성직자의 권위에 바탕을 두고 행해지는 객관적 예전 행위와 회중의 심리적인 작용으로 분리된 것이다. 전자는 12세기 이후의 공적 희생의 설교, 거룩한변화의 설교 등 극히 객관적인 교의의 바탕이 되었고, 또한 후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 요하네스 타울러,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등의 이른바 중세 후기 신비주의를 향한 길을 열었고, 거룩한 유물 숭배나 코르푸스 크리스티. 전통적인 교회력으로서 삼위일체주일 다음 목요일의 행렬에 상징되는 중세적 경건에의 길을 열어 주게끔 되었다. 요컨대, 중세는 예배에 있어서의 주관과 객관의 분열적인 역사였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환경에 적합한 예배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독자적인 창작은 아니었고 어떤 의미에서 로마 예전의 전통을 계승하였따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초기의 예배 방식은 마틴루터에 의해 완성된 것과 쯔빙글러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 스트라스부르에서 1524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쉬바르츠에 의한 것의 세 가지 전통에 귀결시킬 수가 있다. 그 중에서 쯔빙글리의 것은 파렐에 의해 쥬네브에서 발표되었고, 쉬바르츠의 것은 부처에 의해 개정을 거쳐 스트라스부르의 예배 형식이 되었고, 그 위에 1530년에 칼빈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된 뒤에 쥬네브에서 발표되어, 거기서 쯔빙글리=파렐의 예배 형식을 압도한 뒤 정착하였고, 또한 존 녹스에 의하여 스코틀랜드에 전해져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예배 형식이 되었다. 다른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크랜머 대주교가 부처의 도움을 받아 솔즈베리에 전해지는 미사 예전문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예배 양식을 만들었고, 그것이 결국 영국 국교회의 예배 형식의 원형이 되었다.

  이러한 예배 형식은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적으로 개혁적이었다. 그 하나는 예배속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시사하는 모든 말을 배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배에 있어서의 '말씀'의 요소를 중요시한 점이다.

  예배가 객관적인 그리스도 상기라는 전통적 이해를 고수한 것은 루터였다. 그는 이 상기가 성직자의 마술적 양상을 지닌 행위에 집중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여, 이 상기의 행위가 교회 전체의 공동적인 작업인 까닭에 성찬식의 본질이 사귐임을 강조하였다. 그와 아울러 예배에 있어서의 말씀의 요소, 즉 설교와 기도와 고백과 찬송등 모든 것이 이 상기의 공동적인 속성에 속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비하여 쯔빙글리는 상기의 객관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여 그러한 그리스도 상기는 이성적 사고나 심리 작용의 하나로써 인정해 버린 것이다. 루터나 쯔빙글리 두 사람 다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전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들리고 믿게 되는 말씀이었고, 후자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이해되고 믿게 되는 말씀이라는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루터에게 있어서는 성찬식이 눈에 보이고 맛보아야 할 말씀의 구체화로 해석된 반면, 쯔빙글리에게 있어서는 성찬식 그 자체에 아무 뜻이 없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뜻하는 의미의 내용이 중요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칼빈은 그 예배 이해에 있어서는 루터적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쯔빙글리적인 경향을 극복할 수가 없어, 쯔빙글리의 예배관이 그 후의 프로테스탄트 여러 파의 예배관 속에 퍼져 나아가게 되었다.

  뒤이어 17세기와 18세기는 프로테스탄트 예배의 쇠퇴기에 속한다. 퓨리터니즘과 경건주의와 계몽주의의 세 갈래 흐름이 에배 의식에서 그 쇠퇴를 재촉하게 된 것이었다. 이 세 갈래 흐름은 어느 것이나 개인적인 깊이에서 신앙을 포착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상기의 행위는 극히 개인적이요, 때때로 주관적인 사항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루터가 의미한 것과 같은 예배의 공공성은 경시되거나 무시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런 상황속에서도 최소한의 예배의 공공성에 착안하는 것이 없었던 바는 아니었다. 영국에서 17세기에 일어났던 퓨리턴 혁명 중에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개최되어, 웨스트민스터 예배 지침이 만들어진 것은 그 좋은 보기이다. 그러나, 상황은 극단적으로만 흘러, 주기도나 성경 낭동조차 예배에서 제외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예배가 이러한 상황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인 것이다. 영국 국교회에 있어서의 헨리 뉴면이나 미국 독일계 개혁파 교회에 있어서의 필립샤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배 부흥의 직접적 자극이 된 것은 교부학 등 초대 교회의 연구에서 말미암은 예배 생활의 재발견인 것이다. 또한 때를 같이 하여 로마 카톨리교회 안에 베네딕트파 수도사인 돔 게란제 등이 이른바 리터지칼 무브먼트를 일으켜 그러한 부흥의 기운이 교파를 초월하여 전파되어 나간데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에쿠메니칼 운동은 교회 일치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여, 새삼스럽게 예배 이해의 상위의 중대성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 극복을 위한 토의와 실천적인 시도가 오늘날의 예배 부흥의 동향에 박차를 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배에 있어서의 상기의 성격 및 예배의 선교적 성격 등의 발견에 있다. 더우기 오늘날에는 세속화 시대에 있어서의 예배의 의의가 추구되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계시에 참여하는 에배 공동체의 선교적 성격이라는 시점 위에 서서 현대 문화에 즉응하는 예배의 존재 양식이 여러모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