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귀를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귀를 믿을 수 있는가?인종에 따라 취향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 음악은 야만인들에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않고, 우리에게 그들의 음악은 대부분 흉측하고 의미가 없다. (찰스 다윈,[인간의 유래],1871) |
진화론적 사고를 발흥시킨 다윈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세계의 인종적 차이를 인간 발달의 단계의 차이로 접근했다. 혹시 여러분은 인종 혹은 민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음악을 이해하거나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상기 [인간의 유래]의 인용문이 보다 문화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첫쨰, 이 인용문에서 다윈은 음악적 '취향'(혹은 '미학)을 강조했는데, 취향은 앞에서 기욤 앙드레 빌로토가 말한 것처럼 특정 유형의 음악에 대해 많이 노출되고 익숙해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에게 취향은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수단이기도 하다. 음악적 취향에서의 차별은 다른 형태의 차별과 거의 차이가 없다. 다윈이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충분히 오래 살았으면 그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둘째, 위의 인용문은 이해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음악은 특정한 단어와 문법을 갖고 있는 언어와 유사하다. 다윈이 '서양음악이 최고'라고 활실히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 예술음악이 우월하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적인'추정이었으며,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서양음악은 과학에서 가지고 온 자연적 음ㅇ향 법칙에 기초했고, 훨씬 복잡하며, 감정적으로 더 심오하고 의미 있는 근거를 통해 합리화되어 왔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연구를 한다면 이 모든 주장들의 타당성이 사라지며 자문화중심주의로 비춰지게 될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약간 자기중심주의적인 것은 피할 수 없다. 세계를 보는 우리의 지각이 자신의 경험과 그것의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세계음악을 공부해야 하는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의 다양한 음악적 관습과 지각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도옥 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단지 청각 현상이다? 음악에 대한 대부분의 정의들은 음악의 청각적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실제 음악 연주에서는 다른 감각들이 포함된다. 사실 보다 세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서양 클래식 음악회에서 침묵을 고집하며 움직임, 음식, 술을 제한하는 것은 매우 극단적인 예외이다. 서양 이외에서는 움직임, 특히 춤,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 종종 음악을 경험하느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축제에서 음악은 종종 그 이벤트에 공헌하는 다양한 감각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우리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출 때 우리의 주요 감각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촉감, 움직임, 다른 사람과의 교감에 반응한다. 다시 말해 만약 우리가 음악을 단지 순수한 청각 현상으로 다룬다면 우리는 분명히 왜 음악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하고, 왜 음악이 그렇게 세계적인 현상인지 그 이유에 대해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다. 세계의 음악들에 대해 사회적인 것보다 소리에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여러분들은 음악의 어떤 측면에 우선순위를 매겨야 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만드는 것이 우선인가? 기법적으로 '올바른' 연주인가? 소속감의 공유인가?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앞으로 우리가 '음악 듣기'와 '음악하기'로 부르려고 하는 것들을(분명히 음악에서 이 둘 중에 하나만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더라도) 구별함으로써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음악 경험의 유형에 따라 전형적으로 부여되는 가치와 위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음악 전통에 대해서는 어느 측면에 우선권을 둘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항상 곤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아름다운 소리'를 구성하고, 또는 그래서 무엇이 '의미 있는 음악적 경험'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악 듣기'에는 듣는 사람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유지하기 위한 측면들이 포함된다. 서사적인 구조, 변화와 발전, 명상을 할 기회, 혹은 묘기에 가까운 감탄스러운 기교가 그러한 예일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청중의 비평적인 판단이나 또는 보다 지적인 평가를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북인도의 고전 음악의 선율을 조직하고 지배하는 틀인 라가를 소개하는 알랍 부분에는 선택된 그 라가의 '인격'을 탐색하는 즉흥연주가 포함된다. 때로 한 시간이나 지속되는 이 자유로운 시간에 연주자는 라가의 다양한 피치(스루티), 특징적 선율의 제스처(샤란 또는 파카르)에 대한 소개를 조금씩 해나간다. 그 스타일에 익숙한 감상자들이라면 고도의 기술과 상상력이 있는 연주자들이 라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드러내고, 발전시키고, 열정적 감정을 넣는 동안 라가에 생명을 부여하는 이러한 방식의 진가를 알아보고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음악 하기'는 음악의 가치를 그것의 음향적 결과보다는 참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 것으로, 음악이 주는 행복감과 개인적이거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이라는 측면에 주로 가치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음악에서 사람들은 참여하는 것을 선호하므로, 이른바 '틀린 음'이나 '기술적으로 부족함'에 별 관심이 없으며 때로 일부러 무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음악들의 특징적인 부분은 기술적인 요구가 적고, 음악적 구조가 짧게 반복되며, 전체적으로 통일된 집단 속에 개인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참여하도록 용기를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줄라줄라는 다양한 크기로 되어 있는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의 팬파이프로, 네 개짜리 관과 세 개짜리 관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 둘이 짝을 이루어 '호켓' 기법으로 연주된다. 순례나 전투의식에서 유래한 축제가 며칠씩이어지는 동안 줄라줄라를 연주한다. 그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음악 전통과 마찬가지로 연주자들은 연주를 하면서 춤을 추거나 걷는다. 이 합주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주로 다른 집단에게 힘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다. 연주 기술이 간단하고 극히 평범한 구조의 반복되는 선율로 되어 있으므로 소수의 연주자가 그 선율을 인도하면 다른 사람들은 사전 리허설 없이 바로 합류해 연주자 숫자와 연주 소리를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참여를 우선시하는 것이 줄라줄라 연주에서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다른 집단을 만나거나 마을의 광장에 들어갈 때에 음향적 힘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도 매우 중요하다.
줄라줄라의 예가 보여주듯이 음악에서 '하기'와 '듣기'의 차원은 전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축제 기간에 함께 줄라줄라를 연주하는 것을 즐긴다고 해도, 그들은 저녁에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녹음된 줄라줄라 음악을 듣지는 않을 것이다. 줄라줄라의 선율은 반복적이고 소리의 변화도 부족하므로 그것을 녹음한 음반이 월드뮤직 시장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이것이 참여를 우선시하는 음악들이 '열등'하다거나 그들의 감정적인 영향이 조금 덜 강력하고 덜 심오하다는 것을 의미할까?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은 음악 '하기'를 음악'듣기'에 비해 종종 그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위치가 낮다고 여기고, 음악 하기의 강력한 경험을 함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고려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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