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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

[음악학]고음악2, 과거의 음악을 어느 정도까지 재창조할 수 있는가?

과거의 음악을 어느 정도까지 재창조할 수 있는가?

 

  지난 세기의 음악을 탐구하려는 학자들과 연주자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작품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다. 음악은 애초에 연주로서 존재하므로 19세기 후반 녹음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모든 연주가 그것이 끝나는 순간 사라졌다. 18세기와 그 이전에 음악이 어떻게 소리 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로 갈 수는 없다. 대신 학자와 연주자는 글로 쓰인 자료에만 의존해야 하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그림만을 제공한다.

  19세기 이전에는 음악에 대한 많은 사항이 거의 또는 아얘 문서로 기록되지 않았따. 기악이나 성악 연주 기법, 수많은 기악곡과 춤곡 같은 즉흥적 작품들, 거리, 술집, 시골 등지에서 불린 대중적인 음악들에 대한 기록들이 거의 없다. 때때로 이러한 다채로운 청각 문화들의 흔적이 그림이나 일기 같은 자료들을 통해 복원되기도 한다. 그림과 판화는 앙상블에서 연주자들과 악기가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사무엘 페피스(Samuel Pepys)가1660년대에 쓴 일기는 런던 거리에서 들리는 음악들을 묘사한다. 역사에 근거한 연주를 위해 필요한 연주 기법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남아 있는 특정 지역들도 있다. 그런데 16세기 이후에 연주 기술을 설명한 책들이 출판되었지만 주로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한 글들이라 기본적인 기법만을 다루고 있다. 직업 연주가들은 자신의 직업적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연주 기술을 비밀로 유지하고 오직 도제 시스템 안에서만 공유하곤 했다. 실제로 그 시대 많은 책들을 제[대로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가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지난 세기의 이러한 충고는 귀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재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19세기 이전에 음악가들이 어떻게 소리를 냈는지 전혀 들을 수 없는 현재의 연주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한 옵션은 아니다.

  18세기와 그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은 필사본이나 그 시대 판본으로 출판되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악보를 음악이 어떻게 소리 났는지에 대한 철저한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과거 작품들의 악보가 매우 불완전해 보인다. 리듬이나 악기 선택 등이 연주자들의 재량으로 남겨졌기 때문인데, 이 문제에 대해 서는 '고음악'주제의 뒷부분에서 살펴볼 것이다.
  게다가 악보로 적혔던 음악들도 대부분 소실되고 극히 일부만 살아남았다. 많은 필사본들이 쥐와 나방의 먹이로 없어졌고, 우연히 또는 고의적으로 불타서 사라졌다. 19세기 이전에 악보는 일단 연주라는 그것이 당면한 목적을 완수하고 나면 보관될 가치가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래된 악보처럼 쓸모없는 것은 없다'라는 것이 하나의 공통적인 태도였다. 이러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으니 수많은 악보들이 사라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학자들은 중세 필사본의 80-90퍼센트가 없어졌다고 추정한다. 유명한 곡들 중에서도 소실된 것들이 많다. 클라우이도 몬테베르디의 두 번째 오페라인 [아리아나]는 유명한 라멘트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교회 칸타타도 백 곡 가량 유실되었다. 한두 개의 성삭 성부나 기악 성부가 빠진 채 불완전하게 전해지는 곡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실제와 악보로 된 기록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고려하면, 음악학자들 역시 과거 음악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매우 오래된 작품들을 연구하는 것은 마치 절반 이상 사라진 조각을 가지고 퍼즐을 맞추려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학자들과 연주자들은 둘 다 마찬가지로 역사에 근거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과거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가 어떠했는지 상상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연주자들이 과거 작품들을 나름의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연주하고 있다/

  설사 과거를 정확하게 재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역사에 근거한 연주를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이유가 있다. 현재의 연주는 현재의 취향에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의 감상자들이 취향을 바꾸도록 교육받더라도 그들은 21세기에 속해 있으며, 과거 음악 후에 나왔던 수 세기의 음악들을 이미 들은 사람들이다. 리차드 타루스킨은 역사에 근거한 연주자들이 실제로 전혀 역사적이지 않으며, 과거를 현재의 이미지로 리메이크하는 것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타루스킨에 따르면, 작곡가의 의도난 월내 악보에 완전히 충실했다는 일부 역사에 근거한 연주자들의 주장은 이로르 스트라빈스키 같은 작곡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매우 현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실제로 19세기 이전 음악은 어떻게 작품을 연주할지에 대해 연주자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자유가 있었다. 또한 타루스킨은 1980년대에 바로크 음악을 가볍고 빠르게 연주한 것도 역시 스트라빈스키가 유난히 옹호했던 현대적인 미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 버트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과거의 스타일을 탐구하는 것은 현재 문화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과거 양식을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현대 연주 기법이 당연히 모든 것에 우월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각각의 음악에 맞는 기법이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것은 많은 건물과 경관과 문화적 예술품을 파괴시킨 전쟁과 현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어떻게 20세기가 점점 더 과거 시대의 유산에 가치를 두고 보존하는지도 보여 준다. 버트는 타루스킨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근거한 연주가 오늘날 문화에서 결핍된 것에 대한 중요한 필요를 채워주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현재의 취향과 역사에 근거한 연주 사이의 관계는 초기의 녹음으로 남아 있는 20세기 초 연주 스타일에 대한 연구에서도 다루어졌다. 이 녹음들에 대해 연구한 로버트 필립은 서로 다른 음높이의 음들 사이를 미끄러지는 포르타멘토를 많이 사용하고, 비브라토의 사용을 절제하고 짧은 음들을 휘몰아치듯이 연주하는 등의 스타일을 그 시대의 경향으로 보았다. 이러한 것들은 현재의 취향이 아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역사에 근거한 연주를 선호하는 연주자들조차 20세기 초 음악을 연주할 때 이것을 따라하지 않는다. 이러한 초창기 녹음들은 연주 스타일이 얼마나 빠르게 바뀔 수 있는지 뿐만 아니라 과거의 요소들이 현대의 귀에 얼마나 생경한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19세기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갈 수 있다면 그 당시 연주의 어떤 면은 우리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은 지배적인 취향(비록 그들이 지배적인 취향에 영향을 주려고 노력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을 일단 존중해야 하고 그들이 하는 것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연주자로서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과거의 면모들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정격이 아니며 그들 스스로에게 정직한 것도 아니다. 이 지점에서 학자들과 역사에 근거한 연주자들의 목표가 같지 않은 듯하다. 학자들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있어서 불확실성과 공백을 인정하면 된다. 반면 성악가 수잔 헬라우어가 말하는듯이, 연주자들은 '음악적으로 실현 가능한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내가 자주 강조하는 것인데, 여러분은 각주를 노래할 수 없다'.